전승국 소련군의 지독했던 독일 여성 강간 - 독소전쟁(Eastern Front) 그후 이야기

전승국 소련군의 지독했던 독일 여성 강간 - 독소전쟁(Eastern Front) 그후 이야기

German women raped during WWII by the Soviet Red Army Sold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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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로 진입하는 소련 탱크를 쳐다 보는 독일 여성들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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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파괴된 베를린을 떠나 피난길을 나서는 시민들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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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점령 소련군과 시민들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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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성들을 강간한후 아이들과 같이 학살한 

소련군대의 만행 - 1945년 1월 독일 Metgethen

Metgethen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과 수 km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데 
1945년 초 소련군이 진격해 들어옴에 따라 1월 30일에 점령당한다.
하지만 독일군이 반격하여 2월 19일에 재탈환 한다.
그러나 독일군들은 경악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소련군대에 강간당하고 팔다리가 절단된채 살해당했으며 
32명의 어떤 시민들은 테니스장에 가두어져 폭탄에 의해 
한꺼번에 학살당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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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항복 직전 체코 국경 부근에서 소련군들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한 독일 여성 - 194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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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이후 소련군의 강간을 두려워 하여 자살한 독일여성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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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들에 강간당한뒤 학살된 베를린 거리의 독일 여성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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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의 독일군 부상병들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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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전사자의 사체 - 1945년 4월 베를린 



독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죽어간후 

소련과 독일의 최후 전투지인 

베를린 시에 살아남았던 여성들은 소련군들이 

손쉽게 복수를 할수있었던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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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식량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거리에서 죽은 말의 

사체 고기를 도려가는 베를린 시민들 - 194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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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점령군 소련군으로 부터 식량을 배급받는 베를린 시민들 - 194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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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가는 독일 여성을 붙잡는 소련군 - 194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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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후에도 계속되는 소련군의 약탈 - 1945년 7월


베를린의 전 시장인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는 그가 파악하고 있던 
베를린의 강간의 희생자는 90,000여명이라고 증언했다. 
1945년 당시 베를린의 인구는 약 270만정도 였으며 이중 200만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로이터가 증언한 9만의 희생자라는 수는 

의사에 의해 병원치료를 받은 여성들에 국한되며 
실상 훨씬 더 광범위하게 강간이 이뤄졌다. 
약 1만여명의 여성들이 강간의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많은 경우 자살) 
그리고 이 수치에 동부 프러시아, 실레지아와 포메라니아를 

고려하면 희생자의 수는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전공을 막론하고 의사들은 자살방법을 문의하는 여성들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고아와 임산부를 위한 자선 단체인 하우스 데흘렘Haus Dehlem엔 

막 베를린에 입성한 소련군의 2파가 몰아닥쳐 
임산부와 지금 출산을 끝낸 여성들을 닥치는대로 반복적으로 강간했다. 


소련이 점령한 독일 점령지의 10대에서 80대 여성들 90%가까이가 강간당했으며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상 최악의 집단 강간사례였다.
이 공포를 피해 연합국 진영으로 탈출하려는 여성들의 필사적인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 중에는 후에 유명인사가 된 여성도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한넬로레 콜Hannelore Kohl, 
바로 독일의 통일을 이루고 역사상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운 헬무트 콜 총리의 부인이었다. 
그녀역시 12살 때 어머니를 따라 베를린에서 

드레스덴으로 탈출하던중 소련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녀들에게 돌아온건 참혹한 강간뿐이었다. 
어머니와 그녀의 딸은 한 장소에서 동시에 강간당한 것이다.
2001년 어린날의 끔찍한 기억으로 괴로워한던 

한넬로레 콜은 자살로 그 한많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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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최악의 집단 강간사태는 반갑지 않은 선물도 또한 가지고 왔다. 

1946년 독일엔 비극적인 베이비 붐이 몰아닥친것이다. 



소련군에게 점령당한 독일 베를린의 여성들과 

소녀들이 집에서 끌려나와 강간을 당하고 
그들을 둘러싸고 차례를 기다리는 술취한 소련군들의 모습은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이렇게 광란의 2주가 지나도 여성들의 수난은 끝난게 아니었다. 
일부 유태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신분증이 안전을 보장할것이라 
믿었지만 대부분의 강간마들은 글을 읽을줄 몰랐으며 
그녀들 또한 추잡한 욕정의 대상일뿐이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주코프 원수는 강간을 한 병사는 
그 누구라도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수많은 소련군들이 이렇게 사라져간 뒤에야 

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겨우 잠잠해질수 있었다. 

소련의 이런 사례와 대조적으로 독일에서 

강간혐의로 처형된 미군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한 GI의 수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미국의 수많은 정상적인 가정들이라면 그들의 자식들이 
이곳에서 무슨짓을 하는지 안다면 공포와 경악에 몸을 떨고 말것이다.’
강간을 당한 여성들, 특히 이렇게 집단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후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란 무척 어려운일이다.
이들은 대부분 극도의 남성혐오증이나 대인 기피증을 보이며 
우울증이란 악마는 이들이 죽을때까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후 3년동안 약 2백만의 독일 여성들이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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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진격해온 소련군 - 1945년 3월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는 독일과 동맹국을 맺었던 

관계의 댓가를 혹독히 치루어야 했다.
수도 부다페스트가 1945년 3월말경 소련군에 함락된 이후

 5만명의 여성들이 소련군대에 집단 강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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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베를린에서의 소련군 붉은 군대의 행진 - 1945년

독일 여성에 대한 만행은 스탈린의 묵인하에 베리아의 

지시에 따라 점령지에서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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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포격에 의해 대파된 독일 제 3제국의 상징이었던 

제국 의사당(Reichstag) - 1945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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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을 함락시킨후 독일 의회건물인 제3제국의 상징이었던 

제국 의사당(Reichstag)위에 붉은 적기를 꽂는 소련군 - 1945년 5월2일

 

**** “프라우 콤!(Frau Komm!, (어이 거기)여자, 이리로 와)” ***

 

이 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지역에 진주한 소련군 ‘붉은군대’ 병사들이 
처음 배웠다는(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유일하게 할 줄 알았을) 독일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수십년 간 동부 독일 지역 주민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지만 
그 누구도 당시의 일을 입 밖에 꺼내놓지 않는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이나 레닌그라드 전투시 참혹상등 
소련 국민들이 당한 참상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연합군의 독일 진주 후 독일 지역에서 행해진

연합군의 ‘복수극’에 대해선 그동안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침묵해 왔다.

 

그것은 1차 대전 당시와 달리 2차 대전에선 히틀러라는 워낙 분명하고 
사악한 가해자이자 전쟁범죄자가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집단 이었던 독일로서는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해 항변할 자격조차 박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전 후 수십년이 지나면서 일부 독일내 ‘우익(우파보다 강한표현이다!)’ 
역사가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당한 피해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나만이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항변 역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유명한 1980년대 역사가 논쟁(Historikerstreit)을 계기로 독일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닮아갔고,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으면서 상호간 상승작용을 

가져왔다는 등의 논의가 상세하게 진행된 것이다.

이 같은 ‘논쟁적’인 해석을 제외하고서라도 실제 전쟁양상에서는 
연합군의 복수극 역시 잔혹하고 반인륜적인 측면이 많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구체적으로 1943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영미 연합군은 베를린에 있는 20개 주요 건물중
19개를 완파했고 1945년 4월 
13일 포츠담은 문자 그대로 ‘가루’로 분쇄돼 버렸다. 
마그데부르크도 그해 1월 사실상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고 
중세도시인 할버슈타트 역시 미군의 폭격으로 그해 4월8일 건물의 90%를 상실했다. 
드레스덴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리다시피 했다.
 
동부전선에선 소련군이 전투기 폭격보다는 포격으로 동부 독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단치히,마리엔부르크,알렌슈타인

,브레슬라우,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가 파괴되었다.

독일군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한 덕분에 1944년까지 이들 동부 독일의 슐레지엔과 
폼메른, 동프로이센 지역들은 전화로부터 비교적 안전했고

이들 지역은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가득찼다. 
그러나 1944년 중순부터 이들 지역에도 공격이 개시됐고 
1944년 여름 영국 공군에 의해 쾨니히스베르크 시가가 파괴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소련군이 동프로이센 지역에 진입했다.

 

이때 동프로이센의 한 마을에선 소련군은 단 하루 머물렀는데 
그 하루 동안 72명의 여성과 1명의 남성이 살해되었다.
84세의 노인을 포함한 여성들은 모두 강간된 뒤 처형당했고 

일부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은 머리가 박살났고 총살형을 당한 경우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소련의 언론인 일리야 에렌베르그에 따르면 
“붉은군대는 그들의 조국에서 당한 바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전하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 독일군이 마지막으로 저항을 해 본 곳은 
철학자 칸트가 활동했던 쾨니히스베르크

(현재는 도시명이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어 있다.)였다. 
“최후까지 항전하는 요세”로 선언된 쾨니히스베르크는 밤낮으로 폭격을 받았으며 
3개월간의 저항 후 소련군이 1945년 4월8일 진입했다.

 

50만명의 독일인이 얼어붙은 하프강을 건너 탈출을 시도했고
강의 얼어붙은 수면위로 소련군이 폭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상으로도 2만5000여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했는데 7000명이 탄 고야호의 침몰은 
그 유명한 루시타니아호 격침이나 타이타닉호 침몰에 비해 사상자가 더 많은 사례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소련군에 잡혔다 살아난 의사 한스 렌도르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간호원은 소련군 진주 당시 병원에서 환자를 수술하던 도중 강간 당한 뒤 자살했고 
자신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거리 여기저기를 끌려다녔다고 한다.


구금과 강간, 살해는 옛 프로이센의 소련 점령지에서
점령 첫 주간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팔다리가 잘려 산채로 돼지 먹이가 된 경우도 있었다. 
또 기력이 남아있는 남성 거의 대부분과 
일부 여성들이 가축들과 함께 소련으로 끌려갔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연명했고. 
항복한 11만명의 쾨니히스베르크 시민중 
2만 5000명만이 소련에서의 3년반 동안의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독일이 2차 대전의 전범국인 것은 분명하고 그들이 
소련을 비롯한 각지에서 잔혹한 짓을 했다는 것은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그 반대편 역시 완전한 절대적 ‘선’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고
이에 따라 그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양편의 힘없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파시즘의 폭거에 대한 영웅적인 연합군의 승리라는 공식 역사해석의 이면에는
역시 반인륜적인 전쟁의 참상이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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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독일 여성 강간을 주제로 만든 

독일 영화 Anonyma [베를린의 여인 - 주연: 니나 호스) 


1945년 봄과 여름에 전쟁으로 파괴된 베를린에서 살아남으려는 싸움과 
소련군에 의한 반복된 성폭행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의 실제 모델이 된 

루스 슈마허 여성의 소련군에 대한 회고 *** 


독일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의 미국 시사회와 획기적인 대학 연구는
독일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져왔던 문제에 대해 주의를 집중시켰다. 
히틀러의 독일 제 3제국의 몰락 이후 소련의 붉은 군대가 행한 대량 강간 이었다. 

영화는 베를린에 살던 익명의 한 여인이 쓴 실제 일기에 기초로 한 것이다. 
역사 학자들은 1945년 봄 소련군과 연합군이 히틀러의 군대를 이긴 후 대략 2백만의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보고 있다. 

수십년 동안, 독일 여자들 대부분은 그 정신적 상처에 관해 입을 다물어왔다. 
이제, 독일 연구자들은 독일 강간 피해자들에 대한 최초의 연구에 착수했다. 

"당신은 결코 절대로 잊지 못해요"

오랜 침묵 끝에, 83세의 루스 슈마허는 올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미국과 소련의 살인적인 공습과 포격을 피해 

대피소를 찾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독일 동부 할-브룩스도르프의 차가운 물이 무릎까지 잠기는 한 폐광 안에서 
다친 채로 다른 수십명의 민간인들과 모여있던 그녀는 겨우 18살이었다. 

슈마허는 포격이 멈추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고 했다. 
미군이 지나가고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마을의 젊은 여자들을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저는 즉시 다섯 명의 러시아인에게 윤간 당했어요. 
그 기억은 당신에게 자꾸만 계속해서 되살아나요. 
당신은 그런 종류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때때로 그 사건에 관해 얘기를 하고 나선, 몇시간씩 잠을 자곤 했다간 잠에서 깹니다.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면서요. 
당신은 결코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슈마허는 이후의 65년이라는 세월 속에 조금은 잊고 말았다.
자신을 성폭행했던 군인들의 얼굴 그리고 그 고통. 

슈마허의 친구 여럿도 반복해서 강간당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그 일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슈마허는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겪은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한 친구에게 경고해줬어요. 
그 일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죠, 위험이 너무 컸으니까요." 

전후 공산 동독에서, 슈마허는 강간이 일어났던 사실조차 
부인하는 진술서에 사실상 강제로 서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독일 민주 공화국의 공식 기록에 소련은 해방자였기 때문이다 

(전쟁 범죄를 저지른 해방자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많은 여자들에게 정치적 공포와 수치심에 
나치 만행에 대한 죄의식이 혼합되어 일종의 묵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나는 다른 누구의 경험도 알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도 저의 경험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요.
나의 양심은 충분히 무거워요. 
그래서 그걸 더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고요. 
물론 우리는 나치가 한 짓을 부끄럽게 느껴요. 
그렇지만 일원을 일원으로 갚아서는 안되는게 맞죠?" 슈마허가 말했다.




*** 지속되는 강간 충격의 영향 ***

그러나 몇몇 소련 병사들은 강간을 독일이 파괴, 약탈, 강간으로 
소련 시민에게 저지른 것에 대한 복수의 시간으로 간주했다.
역사가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최소 2백만의

독일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다고 추정한다. 
그 수치는 독일의 병원과 낙태 클리닉의 기록에 근거한다. 

슈마허 같이 많은 여자들은 여러 번 강간당했다. 
군법 회의와 다른 여러 기록은 1945년에 수백건의 기록된 강간이 
미국과 프랑스 병사들에 의한 것이었던 것을 보여주지만, 
어머어마한 다수의 강간이 독일의 동쪽 지역에서 소련군에 의해 행해졌다.

그라이프스발트 대학 정신치료와 정신의학 부의 수석 내과의인 필립 쿠베르트 박사는 
러시아군의 본토 독일 여자 강간으로 약 200,000 명의 아이들이 잉태됐다고 추산한다.

지금까지, 쿠베르트는 1945년 강간당했던 노년층의 독일 여성들 35명을 인터뷰했다. 
그 연구의 주된 목적은 피해자들에게 상담을 제공하는게 아니고

장기적인 강간 충격의 영향을 기록하는 것이다. 
쿠르베르트는 모든 피해자들이 죽어서 사라지기 전에 
여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기를 최종적으로 희망하고 있다. 

"그 이야기 대부분이 매우 가슴 저리고,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늦은 목소리라도 목소리를 안내는 것보다는 낫죠" 그가 말했다.

그럼에도, 쿠베르트는 그가 써야 하는 말을 주의해서 고른다. 
독일은 나치의 인종 청소와 공포를 처리하기 위해서 힘들었었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쿠베르트 같은 연구자들과 
과학자들에게 비-유대인인 독일인을 피해자로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독일에서 일어났던 전시 대량 강간 전에 독일 군대 역시 

주로 동부 유럽에서 많은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 물론, 강제수용소에서도 많은 성 폭력이 있었죠. 
전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 독일 나치의 점령하에 있던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지 않는다는데는 어떤 종류의 의심도 되지 않죠."

쿠베르트는 강간 피해자들의 친척들로부터 여러 통의 이-메일을 받았으며, 
몇년 더 일찍 연구를 지휘했었더라면,.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운 바람들이었다고 한다.



*** 여전히 전쟁 무기인 강간 ***


미국 엘에이와 뉴욕에서 개봉한 영화 베를린의 한 여인은 
한 익명의 독일 저널리스트의 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그녀는 1945년 봄과 여름에 전쟁으로 파괴된 베를린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과 소련군의 반복된 성폭행을 기록하고 있다.



*** 영화의 주인공 역의 니나 호스 ***


"강간은 계속됩니다. 집안이며, 사방이 온통 소련군 천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련군을 섬깁니다. 
우리 여자들은 영원히 입을 굳게 다물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남자도 우리를 다시는 결코 만지려하지 않을테니까요. 
비참한 독일이여!" 한 장면에서 그녀가 외친다.


호스의 영화속 캐릭터는 한 소련군 장교의 보호를 받게 되고 
복잡하고 어색한 이상한 관계로 발전된다.
호스는 영화의 주제가 강간이 보스니아, 르완다, 콩고, 다르푸르와 
다른 곳에서 계속 무기로서 사용되므로써 오늘날에도 반향을 불러일으킨다고 믿는다. 


"요즘에도 그것은 사회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저는 아마도 이 영화가 이것에 대한 그런 시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꿔주길 바라는 거죠. 
그런 피해를 당한 여자들은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잊을수는 없겠지만 

고통을 줄이는데는 도움을 줄거에요" 그녀의 말이다. 



*** 위안이 필요한 생존자들 ***


다시 라이프치히의 루스 슈마허가 사는 작고, 비좁은 아파트이다. 
할머니는 고인이 된 남편 쿠르트의 사진을 자랑한다. 
쿠르트는 전쟁중 독일 유보트에서 근무했다. 
그녀는 남편의 재를 바다에 뿌렸다. 
슈마허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강간의 충격에 대해서 
마침내 얘길 나눌 수 있었음을 감사해 한다고 말한다. 


"연구는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건 과거의 모든 것을 되살아나게 했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잠못 이루는 밤이 많습니다." 그녀의 푸념이다.

슈마허는 강간으로 인해 아이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남편은 49세때 작고 했으며, 
주변에 대화를 나눌 사람은 몇명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었죠" 
그녀가 슬픔을 비치며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전 더 이상 
순수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아요' 라고 
그에게 고백했을 때, 그는 저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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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의 루스 슈마허(Ruth Schumacher)는 1945년 히틀러의 제 3제국의 몰락 이후 


2백만으로 추정되는 소련 붉은 군대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자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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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슈마허의 아파트에 놓여있는 그녀의 젊었을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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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스탈린그라드 (1993년 독일) 참고 할 만한 영화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IKV4J0jio
G aknt 08.04 21:35  
전쟁이란 것은 정말 잔인하다.
인간이 이성과 존엄성을 상실해 버리면 동물과 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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