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아먹는 곳이라..." 뒤늦게 드러난 일본의 끔찍한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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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아먹는 곳이라..." 뒤늦게 드러난 일본의 끔찍한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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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없는',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부인하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논쟁은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연일 일본으로 가는 관광객 숫자는 급락하고 있는데, 지난 9월 나는 일본 홋카이도로 향했다. 바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발자취를 되짚기 위해서였다.

홋카이도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의 한 곳인 오타루 항구, 근대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만큼 즐비한 오래된 건물들이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는 이 곳은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있는 관광명소였다. 그런데 이 곳을 찾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은 80여 년 전 이 곳이 홋카이도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첫 발을 디딘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인 것을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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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면적의 80%에 달할 정도로 넓은 땅을 자랑하는 홋카이도,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7년까지만 해도 대부분 지역은 개발되지 않아 불과 1.5% 지역에만 사람이 거주했다. 홋카이도 전체의 인구도 1만 명 남짓한 원주민들 뿐이었다. 전쟁에 열을 올리던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홋카이도에 묻혀 있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캐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땅, 이 척박한 땅을 개발하는데 상당수의 조선인들을 끌고 와 강제노역에 종사시킨다.
 
일본에서 재야사학자로 살면서 평생 강제동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고 김광열 선생. 그는 돌아가시기 직전인 지난 2018년, 자신이 모은 자료 13만 건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강제동원 진실을 파헤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그의 자료는 2019년 한 해 동안 국가기록원에서 분류 작업을 진행했다. 분류가 끝나면 모든 자료는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MBC경남에서는 작년에 방송된 <끌려간 사람들-지쿠호 50년의 기록>에 이어 2019년 김광열이 수집한 또 다른 자료에 근거해 1년에 걸쳐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김광열 선생의 기록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는 1일(오늘) 밤 12시 5분 <끌려간 사람들, 증언>(연출 정영민, 촬영 강건구, 구성 추미전)이라는 제목으로 MBC에서 방영된다.

이번에 주목한 자료는 500여 개에 달하는 녹음 테이프, 이 녹음 테이프는 김광열이 직접 녹음기를 들고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육성을 녹음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작고한 강제동원 피해자들, 우리나라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지만 김광열은 1970년대부터 이들을 주목하고 직접 찾아다니며 이들의 목소리를 녹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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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열이 만난 수많은 피해자들 가운데 고 박병태씨는 홋카이도 강제동원의 진상을 김광열 선생에게 생생히 털어놓았다. 이번 홋카이도 취재는 박병태의 발자취를 따라 홋카이도 강제동원의 실태를 파헤치는 것이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박병태씨가 홋카이도로 강제동원된 것은 1941년, 그의 나이 스물 한살 때였다. 녹음 테이프 속에서 박병태씨는 당시의 상황을 분명히 증언한다.

"제가 도착을 한 것이 1941년 1월 20일경이니까. 하여튼 영하 10도 이하, 되게 추울 때는 영하 30도 가까이 추운 것 같아요. 요사이보다 훨씬 춥습니다. 벌써 50년 전이니까. 광산이 가까운 곳에 내렸는데 그 역 근처에는 만산이 적설이 돼서 눈이 덮혀가지고 분간을 못합니다."

홋카이도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조선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혹한의 추위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고 공통적으로 고백한다. 박병태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함께 조선을 떠나 오타루 항구에 도착한 조선인은 40여 명, 이들의 목적지는 오타루가 아니었기에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무려 보름을 달려갔다고 한다.
 
박병태씨가 도착한 곳은 홋카이도 중부 히가시 시카고에 광산이었다. 도로가 잘 정비돼 있는 지금도 공항에서 5시간을 달려가야 도착하는 외진 곳이었다. 도로를 따라 달려 갈수록 마을은 사라지고 주변에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밖에 보이지 않는 길이 계속 이어졌다. 높은 산은 일찍 산그늘을 드리워 9월 초인데도 벌써 기온은 10도 내외로 내려가 긴 팔 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차를 타고 지나가다 도로를 지나가는 여우를 목격하기도 했다. 실제 이 곳은 지금도 여우뿐만 아니라 곰도 심심찮게 출몰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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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태씨 일행이 끌려온 곳은 석회광산, 당시 박병태씨가 석회를 캤다고 증언한 곳은 지금까지도 석회광산이 운행되고 있었다. 내부에는 조선인들이 묵었던 숙소가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부 취재는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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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석회를 캐고 나르는 일을 했던 박병태 일행은 집이라고 할 수 없는 판자촌에 거주하면서 가혹한 노동과 배고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환경을 견디지 못해 탈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박병태씨는 증언한다.

"집단적으로 10명이나 탈출을 해 가지고 다 잡혀 왔거든. 그래 내 눈 앞에서 되게 맞았어요. 코피가 터지고 눈이 막 붓고, 등더리 막 벌겋고, 반죽음 당했습니다."

홋카이도로 끌려간 조선인이 노역에 종사한 현장은 석회 광산이나 탄광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70%는 탄광으로 끌려가 깊은 땅 속에서 석탄을 캐내는 힘든 노역에 종사했다. 지금도 대표적인 전범기업으로 주목되는 미쯔비시가 운영했던 탄광 자리, 이 곳에서는 1941년 지하 2200미터에서 갱내 화재 사고가 일어난다. 깊은 땅 속에서 일어난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갱내로 물을 넣어 화재의 확산을 막는 것, 갱내에는 53명의 광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위에서 물을 쏟아 부었다. 지금까지 수장된 채 땅에 묻혀 있는 53명 중에는 조선인들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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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동과 추위와 싸우다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 청년 박병태는 깊은 밤 탈출을 시도한다. 어렵게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가 또다시 끌려간
곳은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다코베야'였다.

"그 동안 어디 갔느냐 하면 말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갇히는 감옥이 있습니다. 거기도 돌산이야, 그 돌산에서 날씨가 눈이 내리고 위험해요. 그래서 또 도망치다가 붙잡혀 가지고. '다코베야'라 하면 문어가 '다코'인데요, 문어가 급하면 제 발을 끊어먹는답니다. 그래서 여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다. 그래서 '다코베야'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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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홋카이도에 존재했던 '다코베야'는 최악의 수용소였다. 탈출을 해 공식적인 신분증이 없는 징용 노동자들은 거대한 섬인 홋카이도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이들을 데려가 더 혹독한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일종의 수용소이자 감옥이 '다코베야'였다. 이 곳에 수용된 이들이 바로 지금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홋카이도의 도로나 비행장등을 만드는 데 동원됐다.
 
홋카이도로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동원된 조선인의 숫자는 15만 명, 일본 전역의 20%에 달하는 숫자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의 청춘과 노동의 댓가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채 이미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부터 자신의 사비를 털고 발품을 팔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김광열 선생은, 어쩌면 강제동원 진실논쟁의 싸움이 길고 지난한 것을 미리 예측했던 것은 아닐까?
 
김광열 선생이 모은 자료에 포함한 조선인의 이름은 무려 20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들의 이름은 "인명 데이터 베이스 작업"이 끝나면 국가기록원 홈페이지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공개될 예정이다. 어쩌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후손은 여기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 다른 조상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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